정도전 (鄭道傳 ; 1337~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로서 본관은 봉화()이며 자는 종지()이다. 그리고 호는 삼봉()이며,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서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충주사록()을 거쳐 전교시주부(簿)·통례문지후()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가 되어 전선()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지제교() 등을 역임하였고 이해 권신 이인임()·경복흥() 등의 친원배명()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지어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곳 출신 재상(宰相)이 삼봉재를 헐어버려 제자들을 이끌고 부평부 남촌(南村)에 거주했으나 이곳에서도 재상 왕모(王某)가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헐어버려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유배·유랑 기간에 그는 초라한 모옥(茅屋)에 살면서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결국 고향 영주()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使) 이성계()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使)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성균좨주(), 이듬해 남양부사(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밀직부사(使)로 승진하였고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경연지사()로 성절사 겸 변무사(使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使)·삼사부사(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조민수()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예문춘추관사()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1394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도총제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 (歷代府兵侍衛之制)》를 찬진했다. 한편 태조가 세자로 책봉한 강비(康妃) 소생 방석(芳碩)의 세자이사(世子貳師)로 교육을 담당했다. 1394년 8월부터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을 피해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서울의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그해 《심기리편()》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인간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 (高麗國史)》를, 6월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임무와 실례를 논하고 방침을 제시한 《경제문감()》을 찬진했다. 1396년 명나라에서 그가 추진하던 공료(攻遼)운동에 불안을 느껴 표전문(表箋文)을 트집 잡아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부했다. 1397년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화(禍)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해 6월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왕에게 출병을 요청했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호구와 군관(軍官)을 점검했다. 또한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여 군주의 도리를 제시했으며,《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다. 1398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태조로 하여금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을 동북면으로 보내려 했으나, 8월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방번·방석·남은·심효생(沈孝生)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때 네 아들 가운데 유(游)가 살해되고, 담(湛)은 집에서 자살했다. 종친을 모해(謀害)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유학()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한편, 정도전의 개혁사상은 고려말 국가적인 시련과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양인(良人)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의 건설과 자주국가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례(周禮)를 기본모델로 하여 성리학 사상을 받아들였다. 고려말 사회의 모순은 인간 상호간 증오심의 격화, 즉 윤리의 타락이 원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윤리의 재건이 필요하며, 윤리를 실현하는 수단이 정치이고, 그 전제조건이 경제의 안정이었다. 그는 상하(上下)·존비(尊卑)·귀천(貴賤)의 명분이 바로 서고, 인간마다 자기의 분을 지키면 사회 질서가 확립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하질서의 확립을 위한 윤리도덕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었다. 이를 위한 사상질서로서 성리학만이 유일한 정학(正學)이고 실학(實學)이라는 신념으로 불교가 현실을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종교이며 농장주의 공리(功利)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사상체계라고 맹렬히 비난하고, 인류를 금수로 몰아넣는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도덕윤리의 실현과정으로서 정치는 인간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정치의 주체로 윤리도덕을 체득한 자를 설정했다. 그러한 자격자가 성리학자인 사(士)로서, 진정한 사는 윤리·도덕가일 뿐만 아니라 성리철학자여야 하고 천문·의학·지리·복서(卜筮) 등 기술적인 학문에도 능통해야 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고 역사가이며,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지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는 고정된 세습신분이 아니라 자질이 뛰어난 자라면 누구나 교육을 받아서 사가 될 수 있으며, 농사를 겸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역설했다. 통치체제로 민의 보호를 위해 지방토호에 의한 자의적인 지배를 배제하고 중앙정부에 의한 전국적 지배를 강화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했으며, 그 중심은 군주였다. 군주는 최고의 통치권을 갖고 전국의 토지와 민을 지배하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재상(宰相)이 갖는 재상중심체제를 지향했으며, 통치자의 부정·독재를 막기 위해 감찰권과 언권(言權)의 강화를 중시했다. 통치윤리는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근본이 되어야 하고 형벌은 보조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민본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부국강병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병농일치를 통한 국방체제의 강화와 중앙군의 증대를 통한 수도치안의 강화를 지향했다.

  이러한 체제의 확립은 경제생활의 안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물질적 기초로서 국가재정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농업생산이 진흥되어야 하고, 또한 토지소유관계가 재조정되어야 했다. 고려말 사회적 모순의 가장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극단적인 불평등에 있으므로 먼저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이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삼대(三代)의 공전제(公田制)에 이상을 둔 철저한 전제개혁을 통한 계민수전(計民授田)에 의한 자작농의 창출과 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부세의 공정과 부담 완화를 강조했다. 부세는 1/10세를 기준으로 법정세율 이상의 수취를 배격하고, 균등한 부세수취를 위하여 호적제도의 정비와 군현제도의 정비, 수령의 엄격한 선발 등을 요구했다. 빈민구제를 위한 정책으로서 의창(義倉) 및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제도가 도입되어야 하며, 전쟁이나 흉년을 대비하기 위하여 최소한 3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 《경제육전()》 《경제문감()》 《심기리편()》 《불씨잡변()》 《심문천답()》 《진법서()》 《금남잡제()》 등이 있고, 작품에 〈납씨가()〉 〈정동방곡()〉 〈문덕곡〉 〈신도가()〉 등이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http://deluxe.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9j1048b>
[2003. 5. 10자 기사]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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