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 (鄭文孚 ; 1565~162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해주(海州)고 자는 자허(子虛)이며 호는 농포(農圃)이다. 그리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며 아버지는 부사 신(愼)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 1591년 함경북도병마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정병을 거느리고 북도(北道)에 침공했을 때 부상당해 경성(鏡城)의 유생인 지달원(池達源)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鞠世弼)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포박해 가토에게 항복하자,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국세인을 잡아죽이고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여러 읍과 진을 수복했다. 이어 10월말경 길주 장평·쌍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고, 이듬해 1월 야인(野人) 번호(藩胡)를 격파하고 2월초에는 백탑교(百塔郊)에서 가토의 일본군을 대파해 관북지역을 수복했다.

  1593년 영흥(永興)부사, 1597년 길주(吉州)목사가 되고, 1599년 장례원판결사가 되었으며 그해 문과에 급제했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의 전공을 보고해주는 사람이 없어 논공행상에는 제외되었다. 그뒤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남원부사·길주목사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했다. 그러나 1624년(인조 2) 10월 초회왕(楚懷王)에 대하여 지은 시(詩)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받다가 죽었다. 그후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따라 신원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농포집(農圃集)》이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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