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李儁 ; 1859.12.18~1907.7.14)

  한말의 항일애국지사로서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이며 본명은 순칠(舜七)이다. 초명은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로서 함경북도 북청(北靑)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병관(秉瓘)이며, 어머니는 청주이씨(淸州李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명섭(命燮)과 숙부 병하(秉夏)에게서 양육되었다.

  29세에 북청에서 초시(初試)에 합격, 1894년(고종 31) 함흥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상경,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들추어 파헤치다가 그들의 면관(免官) 운동 때문에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되고 곧 독립협회에 가담,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광무 1)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고 귀국, 다시 독립협회 일을 보다가 무고로 간부 17명과 함께 피체, 수개월 후 석방되었다.

  1899년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되자 민영환(閔泳煥)·이동휘(李東輝)·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침략과 친일 주구(走狗)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를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하고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친일대신(親日大臣) 5명을 성토하다가 피체, 철도(鐵島)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민영환·이용익(李容翊)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로 발전시켰다.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세웠고 함경도 출신 유학생 장학회인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뒤에 이를 서우학회(西友學會)로 발전시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세웠다. 그 해 평리원(評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검사가 되어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하다가 미움을 받아 8개월 만에 평리원에 피검, 고종의 특명으로 석방되어 검사에 복직되었으나 법무대신의 책동으로 곧 파면되었다.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3월 하순 극비리에 고종을 만나 세계각국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는 한편, 한국의 독립에 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고 고종의 밀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헤이그 특사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4월 22일 서울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했으며 다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했다. 그곳에 만국평화회의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6월 25일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공식적인 한국대표로서 회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므로 1국을 대표하여 참석할 자격이 없다 하여 거부되었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침략을 폭로·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언론기관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회의 참석의 길이 막히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순국(殉國)했다. 시신은 헤이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특별시 수유리에 안장했으며,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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