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李東輝 ; 1873~1928)

  독립운동가로서 호는 성재(誠齋)이며 함남 단천(端川) 출생이다. 아버지는 승교(承矯)이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18세 때 군청 통인(通引)이 되었다가 군수의 부패와 탐학에 분개하여 불이 이글거리는 청동화로를 군수에게 뒤집어씌우고 도망하여 한때 숨어 살았다. 개화파 군수가 부임한 후 그의 주선으로 육군무관학교에 입학 1899년 서울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 육군참령(參領)을 지내고, 1902년 개혁당(開革黨)을 조직, 개화운동을 하였으며, 강화진위대장으로 있으면서 강화도에 신식교육기관으로서의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운영했는데, 이 학교의 운영을 본받아 전국적으로 설립된 학교가 개성보창학교·장당보창학교·안악보창학교 등 7~8개교나 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 뒤 강화도 전등사(傳燈寺)에서 진위대원 약 50명과 일반민 약 800명이 가담한 이 전투에서 일본군 6명이 전사했으며 일진회회원이던 군수가 살해되고 화약고 등이 파괴되었다. 그는 강화도 의병조직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한때 인천 앞바다의 대무의도(大舞衣島)에 유배되었다.

  그해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함경도 책임자가 되어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뒤 가족과 함께 중국 동북지방 북간도로 망명했다. 여기에서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의 결성(1912), 나자구무관학교(羅子溝武官學校)의 설립(1914)에 참가했다가 일본관헌의 추적을 받고 마침내 1915(또는 1913)년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勸業會) 활동에 참가한 그는 일본측 모함으로 제정 러시아로부터 독일의 첩자로 몰려 한때 체포되었으나 러시아 혁명 후 석방되었다. 러시아의 10월혁명 성공에 고무된 그는 특히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곧 조선독립 달성의 길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1918년 김립(金立)·유동열(柳東說) 등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 및 김알렉산드라·오하묵(吳夏默) 등 귀화한 조선인들과 함께 한인 사회당을 조직했다.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과 백위파 정권의 시베리아 지배권 장악으로 한인사회당의 활동이 저지되었으나 본국에서의 3·1운동의 폭발을 계기로 다시 활동하게 되었고, 상해임시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성립된 대한국민회의 통합과정에서 한인사회당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동휘가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김립이 국무원비서장이 되었다. 한인사회당의 상해임시정부 참여 자체가 이 정부를 민족혁명의 대표기관으로 삼으려는 하나의 방향 전환이었으며, 또 이 정부를 좌우익 '통합' 정부가 되게 하기도 했다.

  상하이[上海]로 옮겨온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세력은 1920년 국제공산당이 파견한 대한국민의회 부회장 김만겸(金萬謙)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을 조직했고, 이무렵 이르쿠츠크에서도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전자가 세칭 상해파 고려공산당이고 후자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다. 이보다 앞서 소련정부는 좌우익 '통합' 정부로서의 상해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을 원조하기로 하고 1차로 40만 루블을 보내왔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임시정부의 '통합' 정부적 성격에 차질이 생겼고 따라서 이 자금의 사용을 한인사회당 세력이 주관하려 함으로써 물의가 빚어졌다. 1920년 중엽에 와서 이승만퇴치운동을 벌인 국무총리 이동휘는 임시정부 자체에 대한 격렬한 비판적 여론을 배경으로 소련과의 관계강화에 의한 무장투쟁 전개를 목적으로 임시정부의 전면적 개편을 주장하고 나섰다. 같은 해에 임시정부와 소련정부 사이에 소련정부의 한국독립군 양성 원조, 임시정부의 공산주의 선전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체결된 것도 이와 같은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추종하는 친미외교독립론자들에 의해 이동휘의 주장은 거부되었고 결국 1921년초 이동휘 세력은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이로써 한인사회당 세력과 이승만·안창호 등 우익세력의 연합에 의해 성립된 '통합' 정부로서의 임시정부는 약 1년여 만에 그 성격이 바뀌고 말았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자금의 사용권을 두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파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되었지만, 사회주의혁명을 당면 목표로 하는 이르쿠츠크파와 민족혁명이 사회혁명의 전제라고 주장하는 상해파 사이의 대립항쟁은 이후 끈질기게 계속되었고 1921년의 자유시사변에서 그 하나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두 파의 고려공산당은 서로 모스크바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얻기 위해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대회에 각기 대표를 파견했다. 이동휘도 이 시기에 모스크바로 가서 극동인민대표자회(극동노력자대회)에 참가한 후 1921년 11월 28일 레닌을 만나 조선의 독립문제를 의논했다.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자로서의 그의 정치적·사상적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후 그는 1922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를 통합하기 위한 웨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통합대회를 주관했으나 고려혁명군 문제를 둘러싼 한명서(韓明瑞)와의 논쟁으로 오히려 대립이 심화했다. 국제공산주의의 '일국일당원칙'에 의해 2개의 고려공산당이 해체되고, 조선공산주의 운동자들의 역량을 결집하고 조선 국내에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기관으로서의 '꼬르뷰르'[高麗局]가 설치되었을 때 그 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꼬르뷰로 안에서도 이동휘 등 상해파는 조선공산당 조직이 시기상조라 하여 먼저 민족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고, 한명서 등은 먼저 조선공산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은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꼬르뷰로도 해체했다(1924).

  한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1923년 만주의 영고탑(寧古塔)에서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적기단(赤旗團)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적기단은 "우리들은 민족혁명과 무산계급 공산혁명의 어느 것도 구애되지 않는다. 한족(韓族)의 혁명이라면 추진하는 것이다, 돕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과 같이 민족혁명과 공산혁명의 동시 수행을 표방한 무장투쟁단체였다. 이 선언에는 넓게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좁게는 이동휘의 혁명노선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기단은 만주지방의 몇 곳에 무장단체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 무장단체에는 이동휘의 영향 아래 있는 무장군인들이 소련령 이만지방으로부터 옮겨와 배치되었다. 안투 현[安圖縣] 내두산(乃頭山)에 있었던 150명과 어무[額穆] 지방에 있었던 200명의 무장부대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으며 그중에서도 오성륜(吳成崙) 부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한다.

  꼬르뷰로가 해체되고 1925년 국내에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으나 그는 조선공산당과 직접 관련된 활동을 하지 못했다. 만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는 설도 있었으나 그 아들 이영일이 쓴 〈이동휘전기〉가 전해짐으로써 1927년 이후 그가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에서 활동했음이 밝혀졌다.

〈이동휘전기〉에 의하면 1927년에 국내에서 100여 명의 공산당원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교포사회가 개최한 군중대회에서 이동휘는 "이 혁명운동의 전선에서 투쟁하는 전사는 되지 못해도 이 전선에서 용감히 투쟁하다가 희생된 세계 자본국가 감옥에서 고통받는 혁명자들을 위해 MOPR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려고 결심했다"고 연설한 후 블라디보스토크 시의 MOPR 시간부 조직지도원이 되어 1929년까지 이 조직에서 활동했다. 이후 1930~35년에 그는 소련의 변강(邊疆) MOPR에서 간부로 활동했는데, "그당시 원동(遠東) 변강의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도시나 농촌은 물론 어장·탄광·목재소 등에서까지도 MOPR의 야체이카들이 조직되었고 모두 이 회의 회원이 되어 열성적으로 참례했다"고 한다. 그는 MOPR에서 활동하는 중에도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코민테른 대회에 대표로 참가했고, '12월 테제'로 조선공산당의 해소와 재건이 결정된 후 그가 직접 만주나 조선에 와서 당 재건사업에 종사한 것 같지는 않으나 윤자영(尹滋英)·김철수(金綴洙) 등을 중심으로 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계의 당 재건사업인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활동을 뒷바라지했다. 1932년 10월 MOPR에서의 열성적 활동으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동휘는 1935년 1월 수청지방에서 야체이카 사업을 시찰하고 수청 진불을 떠나 알촘 탄광으로 가다가 심한 눈보라 속에서 독감에 걸렸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자택으로 옮겨졌다가 1월 31일 죽었고, 2월 4일 블라디보스토크 피르바 야레츠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으며, 뛰어난 풍모와 지도력을 갖춘 위에 자기 개신을 거듭함으로써 애국계몽운동과정과 이후의 민족해방운동과정을 통해 항상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http://deluxe.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7a3129b>
[2003. 5. 8자 기사]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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