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정벌 (羅禪征伐)

  조선 후기에 청나라의 요청으로 2회에 걸쳐 조선군(軍)이 러시아군을 정벌한 일이다. 나선은 러시안(Russian)의 음역(音譯)이다. 러시아는 13세기 이래 몽골의 지배 아래에 있다가 15세기 말부터 독립하여 시베리아를 정복하였다. 그들은 곡식을 생산할 땅과 광물자원을 찾아서 헤이룽강[黑龍江] 쪽으로 남진하였는데, 1644년에 포야르군프, 1649년에는 하바로프의 탐험원정대가 헤이룽강에 이르러 그 지세 등을 조사하였다. 1651년 헤이룽강 북쪽인 야커싸[雅克薩] 하구에 알바진성(城)을 건설하여 군사 ·식민의 근거지로 삼았다. 하바로프가 알바진성에서 다시 헤이룽강 동쪽을 따라 내려와 1652년(효종 3) 우쑤리강[烏蘇里江] 하구에 아찬스크(지금의 하바로프스크)성을 구축하자 그 지방의 원주민인 아창족(阿槍族)과 충돌하였다.

   아창족은 당시 그들을 통치하고 있던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청나라와 러시아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때 청은 중국 본토의 공략에 몰두하고 있어서 만주 수비가 허술했던 관계로 1차의 원병은 러시아군에게 패퇴당하였다. 즉, 청은 영고탑(寧古塔) 도통(都統)이 2,000명의 병력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했으나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러시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남진을 계속하자 1654년(효종5년) 1월 청나라는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조선에 보내 3월 10일까지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할 것을 요구하는 계문을 주고 원병을 요청하였다. 효종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의견에 따라 원병을 보내기로 하고 함경도 병마우사 변급(邊?)을 사령관으로 삼았다. 변급은 정예 조총군(鳥銃軍) 150여 명을 거느리고 1654년 3월 26일 두만강을 건너 4월 16일 청병(淸兵) 3,000명과 영고탑에서 합세해서 다시 출발하여 후퉁강[厚通江:混同江]에 이르러 러시아군과 접전, 호통(好通:依蘭)에서 격파한 뒤 5월초 주위 5리의 토성을 쌓아 놓고 16일에 회군하여 6월 13일에 영고탑을에 들어와서  7월에 돌아왔는데, 이것이 제1차 나선정벌이다.

  1658년(효종 9) 2월 19일에 청나라는 재차 구원병을 요청해 병마우후 신류(申瀏)가 선발된 정예군 200여 명과 초관(哨官)·기고수(旗鼓水)·화정(火丁) 60명을 인솔하고 3개월분의 군령을 가지고 그해 5월 초에 영고탑으로 향하게 했다. 조선군은 6월 5일에 승선하여 송화강의 본류로 나아가 6월 10일에는 멀리 헤이룽 강 합류점까지 이르러 러시아의 지휘관 스테파노프(Stepanov) 선대와 만난 격전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8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났으나, 조총수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스테파노프를 비롯한 러시아선(船) 10척을 불태우고 적군 270명을 사살하는 등 대부분을 섬멸시켰다. 전투직후 청의 요청에 따라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해 11월 18일 영고탑을 떠나서 12월 12일에 회령(會寧)에 귀환했다. 이것이 제2차 나선정벌이다. 당시 효종은 병자호란 때 당한 치욕을 씻을 생각으로 북벌계획을 추진중에 있었는데, 2차례의 나선정벌은 조선의 군사력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비록 파견된 군사의 수는 많지 않았으나, 조선군의 사기와 사격술이 뛰어났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2차례의 나선정벌 후에도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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