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1402년(태종 2) 5월 김사형(金士衡;1333~1407) ·이무(李茂;1355~1409) ·이회(; ?~?) 등이 작성한 세계지도로서 크기는 세로 158.5㎝, 가로 168.0㎝으로 비단 바탕에 그린 채색 필사본이다. 이러한 사실은 권근(權近)의 《양촌집(陽村集)》에 의해 전해지며,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 교토[京都]의 류코쿠[龍谷]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규슈[九州] 시마바라 시[島原市] 혼코지[本光寺]에도 유사한 본이 있다. 《양촌집》 권2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와 그 밖의 사료(史料)에 의하면 이 지도는 1399년(정조 1) 김사형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나라의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1330)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1328∼1392)의 두 지도를 합하여 개정한 것이다.

  이 두 지도에는 랴오둥[遼東]의 동쪽 부분이 많이 생략된 대신 거기에 조선을 그려 넣고, 1401년(태종 1)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새 일본지도에 이키섬[壹岐島]과 쓰시마섬[對馬島] 등을 보충하고 참고하여 일본을 그려 넣어, 그 전보다 완전한 세계지도를 작성하고 ‘혼일강리대국지도’라고 이름붙였다. 이 지도는 1328년에 주사본(朱思本)이 작성한 ‘여도(輿圖)’와 지명이 똑같은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의 지도들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한 것으로 본다.

  당시 조선은 수도 이전과 행정구역의 개편 그리고 압록강·두만강 유역일대의 영토회복과 주민 이주 등 일련의 국가적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왕조는 각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부터 지도와 지리지의 편찬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불안정한 북방 영토 및 고려 말 이후 잦은 왜구의 침입등에 대비하기 위해 세계지도의 제작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도 제작은 행정·국방상의 필요성 이 외에 조선왕조의 국가적 권위와 왕권을 확립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즉, 중국 중심의 세계에 조선왕조가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세계지도를 통하여 보여줄 수 있었다.

조선은 세계지도를 만들기 전에 우선 사신을 통하여 다른 나라의 지도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지도 제작에 조정의 중신들 (좌정승과 우정승)이 직접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세계지도의 제작이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에서 아랍지역을, 청 준의 혼일강리도에서 중국을, 이 회의 팔도 지도가 동서가 남북으로 된 행기도에서 각각 우리 나라와 일본을 참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아랍·중국·한국·일본 지도가 합쳐져서 편집된 세계지도이며 유럽과 아프리카의 지명은 성교광피도에서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신대륙이 빠져 있는데 이는 이 지도가 신대륙 발견(1492)보다 무려 9년이나 앞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이 지도에 나타난 서방(西方)에는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포함되어 있으나 인도반도가 없고, 나일강 수원(水源)의 표현방법이, 특히 1267년에 베이징[北京]에 가지고 왔던 자말 알 딘의 지구의(地球儀)와 비슷하다는 점 등은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슬람 과학의 영향을 받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작된 거의 유일한 세계지도로서 조선 전기의 세계지리학의 지식을 결산한 것이며, 17세기에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는 가장 훌륭하고, 사실상 유일한 세계지도였다. 이 지도의 큰 결점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의하여 중국과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넣음으로써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점이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인터넷"http://ojiri.narun.net/4jaryo/1.jiri/hon-il.htm"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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