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西學)

  조선 중기 이후 조선에 전래된 서양사상과 문물(文物)을 말한다. 좁은 의미에서는 가톨릭교를 의미하며, 그 때문에 이를 서교(西敎)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고도 하였다. 과학의 발달과 종교개혁을 통하여 발전된 유럽 여러 나라의 근대적 자본주의 세력은 16세기 이후 상품거래, 식민지 개척, 가톨릭교의 전파 등으로 동양에 영향을 끼쳤다. 서양의 정치·경제·문화의 세력은 중국의 도덕적 고전문화(古典文化)를 압도하여 중국을 새롭게 각성시켰다. 중국에 해마다 많은 중국 사신과 수행원을 파견하는 조선도 자연히 이들을 통하여 서양의 문물·학술 등에 접하게 되었다.

  중국을 통한 서양문화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는데, 최초의 것은 세계지도와 마테오리치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였다. 1610년(광해군 2)에 에 사신으로 갔던 허균(許筠;1569~1618)은 한국인 최초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천주교의 기도문인 게(偈) 12장을 얻어왔으며, 역시 광해군 때의 이수광(李;1563~1628)은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했고, 유몽인(柳夢寅;1559~1623)도 〈어우야담 於宇野談〉에서 천주교 교리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유교·불교·도교와의 차이점을 논했다. 또 1631년(인조 9)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鄭斗源;1581~?)이 천리경(千里鏡)·서포(西砲)·자명종(自鳴鐘)·염초화(焰硝花)·만국지도(萬國地圖)·천문서(天文書)·서양풍속기(記)·천주교서적 등을 가져왔다. 1645년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아담 샬에게서 천문·산학(算學)·서양종교에 관한 책들을 많이 가져 왔고, 지구의(地球儀)·천주상(天主像)도 가져 왔다. 한편 박연(朴淵;1595~?) 및 하멜 등 서양인이 표류, 조선에 이르게 되어 서양식 대포의 제조 등 새로운 서양 과학을 배우게 되었다. 서양문물이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학자들에게 알려져 그들의 학문적 탐구심의 대상이 되었고, 1654년(효종 5) 조정에서 개량력(改良曆)인 시헌력(時憲曆)을 채용하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물과의 접촉으로 영국·프랑스 등의 문명국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들의 세계관에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천문학을 비롯한 서양학술의 성과에 대하여 놀라, 당시의 지식인들은 실증적이고 경험주의적인 관찰의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서양문물과 함께 전래된 가톨릭교에 대하여, 처음에 유학자들은 종교생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학문적·사상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서 흥미를 느꼈다. 당시의 학자 중에서 가톨릭교에 흥미를 느끼고 또 그 영향을 받았던 사람은 권철신(權哲身)·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약종(若鐘)·약용(若鏞) 3형제, 이벽(李蘗)·이가환(李家煥) 등이었다. 가톨릭교의 사상은 양반사회의 체제가 무너지고 전통적인 유교적 규범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당시의 사회 풍조에 안성마춤이어서, 현실 생활을 하나의 고난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여러 사회 계층의 사람들, 특히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신앙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실세(失勢)한 남인학자에 의하여 신봉되었으나, 차차 재야(在野)의 양반·중인(中人)·상인(常人),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압박을 받던 부녀자층에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어 갔다. 그런데 가톨릭교는 그 의식 및 교리가 조선시대 지배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유교의 그것과 상치되는 점이 많으므로, 사교(邪敎)로 인정되어 1786년(정조 10) 이래 계속해서 탄압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1801년(순조 1)에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앞에서 열거한 남인학자 등 많은 명사(名士)와 신도들이 죽었다. 가톨릭교는 조선시대의 국가·사회조직에 대하여 결정적인 개혁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지식인에게 전통적인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또 조선 후기의 개화사상(開化思想)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 홈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