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死六臣)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惡刑)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殉死)한 조선 전기의 6총신으로서 성삼문(成三問:承旨) ·박팽년(朴彭年:刑曹參判) ·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 ·이개(李塏:直提學) ·유응부(兪應孚:中樞院同知事) ·유성원(柳誠源:司藝) 등을 말한다. 이들은 전에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으로부터는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사람들로서,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3공(公)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使臣)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雲劍)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화로 세조(수양대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綢)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음모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으로 처형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또한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김문기(金文起) ·권자신(權自愼)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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